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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상도 못할만큼 자신을 무성의하게 대하고 있어

호롱호로롱 2021. 8. 29. 13:22

 

 

그러니 누구라도 겁쟁이인 거야. 한구석의 자신에게 매몰되어 멈추어 서 있는 거지.

 

 

 

 

 

 

 

 

 

 


BGM▷ Link

 

 

 

....사람들이 고독을 굉장히 두려워하잖아요. 그런데 자유라는 것은 외로워야 자유로운 거예요. 누군가가 이렇게 끄나풀이 매어져 있을때는 자유롭지 못해요. 만일 자식이라든지 아내라든지 또는 사회적 지위라든지 이런 끈이 묶여 있을때는 절대 자유롭지 않아요.  

— 故 박경리 작가

 

 

 

 

 

 

 

 

"공항으로 나가야 해. 내일까지 못 돌아올 거야."

 

컵에 우유를 따르던 선화와 입안으로 딸기를 가져가던 봄이가 그대로 멈춥니다. 서윤의 얼굴은 평소처럼 단정했지만 조금은 낯설었습니다. 어떤 우울감이 눈매나 뺨의 외곽선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들기라도 한듯—짚어내기 어려운 표정에 두 사람이 잠시 침묵합니다. 먼저 정적을 깬 건 봄이었습니다.

 

"서윤아,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

"응. 별일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올 때 뭔가 사 올까? 간식이라던가."

 

외박하는 친구를 염려하는, 지극히 평범한 동거인들의 대화. 하지만 선화는 봄이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찹니다. 이 멍청이는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 셈인 거지? 두 사람이 조잘거리는 소리를 듣다 시선을 돌립니다.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베란다에서 불어옵니다. 햇살을 받는 하얀 커튼이 흔들거리는 모습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깔끔한 거실과 물기 하나 없이 정돈된 주방.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선화가 바라던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희미해졌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백선화와 초봄, 두 학생은 동급생인 신서윤에게 붙잡혀서 이 집안에 감금당했습니다. 서윤이 두 사람에게 감금 이상의 폭력을 휘두르거나 물품을 갈취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저, 서윤은 두 사람이 이 집에 머물기를 바라는 듯했습니다. 상황이 이래서인지, 타고난 성격 탓인지, 봄이는 서윤의 감금에 별다른 저항도 없이 익숙해졌습니다. 속이 답답한 건 선화뿐입니다. 이런 시답잖은 짓거리에 끌려다니는 것 자체를 어이없게 여깁니다. 강제로 감금당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겠죠. 

 

이번 일은 드문 기회입니다. 서윤은 겉보기와 달리 사람을 옮아 매는 방식이 철저하고 광적인 면이 있습니다. 둘에게 직접적인 가해를 입히거나 억지로 설득한 건 아닙니다. 그는 두 사람의 기색을 예민하게 눈치챘습니다, 집밖으로 나갈 방법을 완전히 틀어막고, 주변에서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능숙하게 처신합니다. 그런 모습이 선화를 몹시 찝찝하게 만들었습니다. 유하게 웃는 모습으로 태연하게 저지르는 지나치게 결벽적인 행동들. 하지만 그런 서윤이 집을 비운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애초에 남에게 당할 성격도 아니고, 언제까지고 참아줄 필요가 없습니다. 봄은 현관에서 서윤을 배웅합니다. 선화는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현관 쪽을 힐끗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습니다. 시간은 충분하므로 감시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행동하는 것이 지금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문장을 성의 없이 읽으며 잠자코 기다렸습니다. 현관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집니다. 선화는 몸을 일으켜 베란다를 내다봅니다. 조금 기다리니 서윤이 건물 밖으로 나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햇빛에 눈이 부셔 선화가 눈을 찡그립니다. 문득 서윤이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립니다. 저 위치에서 베란다가 제대로 보일리 없음을 알면서도 선화는 인상을 구깁니다. 곧 택시 한 대가 서윤 앞에 멈춰서더니 그를 태우고 떠납니다. 뭘 꼬라보는 건지. 건조한 입술로 중얼거리며 선화가 몸을 돌립니다. 그리고...

 

"선화야 뭘 보고 있어?"

"아 씨 깜짝이야!"

 

기척도 없이 성큼 다가온 봄이 궁금증을 잔뜩 담은 눈으로 그를 쳐다봅니다. 그는 대꾸 없이 투덜거리며 봄이를 지나칩니다. 봄이는 신경 쓰지 않고 그를 따라갑니다. 그리고는 두런두런 말을 걸었습니다.

 

"오늘 서윤이가 없는데 저녁은 어떻게 먹을까? 딸기 잔뜩 씻어서 쌓아놓고 먹을까? 음 이건 밥이 아니긴 하지만... 평소에 잘 챙겨 먹으니까 하루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알게 뭐냐. 너 혼자 챙겨 먹어. 나는... 생각 없으니까."

 

나는 나갈거니까. 그렇게 말하려다가 슬쩍 내용을 바꿉니다. 물론 봄이는 얌전한 아이지만,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건 신중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이미 이 집에 완벽하게 적응해버린 봄이니까요. 가지 말라고 선화를 붙잡으면 몹시 성가셔집니다. 놔두고 가기 찝찝하지만 그렇다고 데리고 나가는 건 더 어렵습니다. 선화가 혼자 생각에 빠지니 봄이도 더 건드리진 않았습니다. 대신 소파에 앉아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합니다. 소파 옆의 탁자는 말끔한 이 집에서 유일하게 물건이 쌓여있는 공간입니다. 겹쳐 놓인 서너 권의 책. 책에 읽다 만 페이지를 표시하는 방식도 셋 다 다릅니다. 봄이는 얼마 전에 서윤이가 선물해준 딸기 모양 팬던트가 달린 책갈피를 빼서 내려놓습니다.

 

성격도 성향도 다른 세 사람은 학교에서 독서부로 마주쳤습니다. 그때까지는 이상할 것도 없이 평범했습니다. 신서윤이 이런 또라이고, 초봄이 이런 멍청이인지 몰랐을 뿐이지. 선화는 질리는 기분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곧잘 짜증을 내는 그라고 해서 항상 똑같진 않습니다. 험한 말을 지껄이는 거로도 풀리지 않는 감각이라는 게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 무력한 것, 그리고 약간의 피곤함. 가늘게 뜬 검은 눈으로 봄이를 힐끔 쳐다보다 선화는 몸을 돌립니다.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자신의 방 안에 들어갑니다. 밤에 움직이기 위해 미리 자둘 생각이었습니다. 성의 없이 침대에 몸을 내던집니다. 잘 말린 이불은 아늑합니다만 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억지로 눈을 감아봅니다. 

 

 

 

 

 

스포트라이트가 허공을 가로질러 그를 비춥니다. 온 사방은 새카만 어둠입니다. 하지만 선화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처럼 노려봅니다. 신속한 동작으로 고글을 착용하고 장전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과녁을 응시하듯 한 곳을 노려보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립니다. 건조한 그의 시선만큼이나 냉담한 허공에 발포합니다. 성과를 일러주는 야유나 함성조차 없습니다. 그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포트라이트의 불빛이 꺼집니다. 이제 그의 형상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눈을 감아도, 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는...

 

 

 

 

 

"망할..."

 

이불을 사납게 움켜쥐고 잠에서 깹니다. 워낙 마른 편이라 조금만 힘을 줘도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왔습니다. 기분 나쁜 꿈을 꿨다고 신경질을 내다가 몸을 일으킵니다. 거실의 불은 꺼져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지 봄이는 소파에 기대어 새근거리고 있습니다. 선화는 혀를 차며 대충 자기 방 이불을 가져와 위에 덮어버립니다. 아이는 조금 쌀쌀했는지, 무언가 포근한 게 닿자 끌어안고 몸을 말아버립니다. 깊게 잠든 듯했습니다.

 

'그럼 이제 이 빌어먹을 자물쇠를 풀어야 하는데.'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해서 그런지, 서윤이는 어디서 보지도 못한 자물쇠를 찾아와 현관에 줄줄 설치해두곤 했습니다. 이러다 나가서 열쇠공이나 하게 생겼다고 윽박지르던 생각이 납니다. 선화는 조용히 현관에 다가갑니다. 새로 추가된 자물쇠가 없나 살펴봅니다만, 크게 변한 건 없었습니다. 이제 좀 방심했나? 조금 의문스러웠지만 이내 신경 끄고 자물쇠를 풀어보기 시작합니다. 

 

"겨우 다 풀었네. 신서윤 이 미친놈..."

 

숙이던 몸을 간신히 풀고 한숨을 짙게 내쉽니다. 필요한 물건 몇 가지만 챙겨서 빠르게 집을 빠져나갑니다. 현관문을 여니 아파트 복도 밖으로 선명한 밤하늘이 보였습니다. 그는 이런 광경에 심취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감상을 가질 여유도 없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다가갑니다. 한밤중이라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층에서 로비로 내려가는 답답한 시간 동안 선화는 벽에 고개를 기대고 기다렸습니다. 경쾌한 소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립니다. 로비의 공기는 밤에 식어서 다소 쌀쌀했습니다. 그렇다고 바깥공기가 완전히 낯설진 않습니다. 어느 순간, 감금과 동거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이 되었습니다. 서윤은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진 않았지만, 함께 외출하곤 했습니다. 셋이 함께 장을 봐서 돌아오는 길에 물건을 냅다 던지고 가버릴까 생각한 적도 많습니다. 

 

선화는 아파트의 공원을 지나쳐 거리로 나옵니다. 건널목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버스 서너 대가 오가는 이 정류장에서 어떤 버스를 타던 본래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신호등의 불이 켜지자 정지했던 차들이 다시 움직입니다. 먼발치에 버스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입니다. 가로등이 켜진 정류장 아래에 버스가 멈추어 섭니다. 늦게 귀가하는 사람 두 어명이 내려서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다시 버스가 시동을 걸고 정류장을 지나칩니다.

 

선화는 여전히 정류장에 서 있습니다. 그는 마른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가 몸을 휙 돌립니다. 걸어가도 상관없으니까. 그리 멀지도 않으니까. 잔상 같은 충동이 단호하게 이어졌습니다. 그는 충동을 따라 어두운 거리를 따라갑니다. 상가의 싸구려 야경과, 오가는 취객과 잡상인들. 늦게 마트에 들러서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들까지. 아무런 접점도 없는 인간들을 지나칩니다. 점차 상가와 멀어지고, 인적이 드믄 골목에 들어섭니다. 가로등이 적어서, 나무 아래라도 지날 때는 정말 어두웠습니다. 저 멀리에 있는 가로등이 깜박거립니다. 고장이라도 났나 생각하며 시답잖게 여깁니다. 점차 가로등과의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탁.

 

 

 

조명의 빛 아래에 한 발을 내딛은 순간— 가로등의 빛이 허망하게 꺼집니다. 순간적으로 사방이 더 없이 어둡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고작 몇 초일 뿐입니다. 가로등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걸요. 그렇다고 선화가 이런일로 겁을 먹을 리도 없으니까요. 그는 잠시 멈춰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칩니다. 집 근처의 익숙한 풍경이 보입니다.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마치 몸만 움직이고, 정신은 어딘가에 멈춰있는 듯한. 모든 행동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아주 이상하게 다가올 표현이지만, 자신이 꼭 길이라도 잃은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검은 허공 위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그늘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다수의 시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름 석 자와 사격의 결과만 확인하고 떠날 관중. 그리고 ...어머니.

 

그는 결국 다시 멈춥니다. 잔뜩 찡그린 얼굴이 건조하게 늘어집니다. 관성에 억지로 굴러가던 기계장치가 막다른 길에 부딪쳐서 온갖 부품을 우수수 쏟아내듯. 선화는 문득 지독한 피로감을 느낍니다.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성가셨습니다.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더 정직합니다. 무엇이 자신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인정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선화는 몸을 돌려서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행동의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알 것 같지만 굳이 끄집어내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선화는 그저 어이없이 실소를 흘렸습니다. 

 

 

 

 

 

봄이 일어났을 때는 늦은 아침이었습니다. 포근한 이불에 둘둘 말려서 잠꼬대하다가 햇빛에 눈을 뜹니다. 부스스 일어나 하품을 하고 주변을 둘러봅니다.

 

"일어났냐."

 

선화가 유리컵에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십니다. 봄은 여전히 잠에 취한 눈으로 깜박거리다가 옹알이 같은 대답을 하곤 이불을 두른 그대로 욕실로 걸어갑니다. 선화가 화장실까지 가져갈 거냐며 이불을 뺏어 들고 투덜거립니다. 잔소리를 듣던 봄이의 안색이 갑자기 밝아집니다. 띵동—하고 울리는 초인종소리. 봄이가 눈을 반짝이며 현관으로 달려갑니다. 예의 웃는 얼굴로 집안에 들어서는 서윤이와 신나게 재잘거리는 봄이. 선화가 그 둘을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입니다. 답답하고 익숙한 하루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상상도 못할 만큼 자신을 무성의하게 대하고 있어.

그러니 누구라도 겁쟁이인 거야. 한구석의 자신에게 매몰되어 멈추어 서 있는 거지.

 

 

 

 

마지막으로, 우리는 제대로 인지할 필요가 있어.

밀어닥친 상황에서 —정말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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